송금대전, 명 야전군의 붕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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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n931682 작성일20-08-09 21:39 조회184회 댓글0건본문
서론
송금대전은 명,청시대에 가장 큰 전투 중 하나고 명의 야전군이 붕괴되어 버릴 만큼 참혹했던 전투이다. 그러나 송금대전은 그 중요도에 비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사실이 꽤 많다. 송금대전에 앞서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요동 함락 이후 명의 요서 방어선
명은 요동이 함락된 이후 거침없이 진격하는 누르하치군의 기세를 못 견디고 산해관으로 후퇴하고자 한다. 이에 원숭환은 영원에서 누르하치군을 격파하고 요서 방어선을 신설한다. 이 방어선은 명 최후의 보루인 산해관으로 가는 길을 튼튼하게 방어해주었다. 실제로 1626년 이후 한동안 홍타이지는 중원 침공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요서에서 발목이 묶여야 했다. 당시 요서 방어선은 이런 구조였다.
금주는 최전방 방어의 요충지였고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금주가 뜷리면 요서회랑의 송산과 흥산 태산은 바람 앞의 등불일 정도로 금주는 최전방 방어를 해주는 요새였다, 그에 비해 후금의 입장에서는 금주가 심양을 위협하는 눈엣가시였으며 금주성을 함락하고자 공세를 번번히 가하지만 실패한다.
이제 후금은 중원 진출이 막힌 듯 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1629년 북경을 포위한다. 도대체 왜 후금이 북경을 포위하였단 말인가? 요서의 방어선이 뜷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요서 방어선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숭정제와 원숭환이 간과한 것은 북경으로 갈수 있는 길이 요서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금의 중원 약탈
1629년 홍타이지는 하라친부를 경유하여 장성을 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북경을 포위한다.
북경에 당도한 후금군을 보자 명의 문무백관들은 도망쳤으며 병사들도 모두 당황했다. 그러자 원숭환은 밤낮을 달려 북경의 포위를 간신히 푸는데 성공하나 후금은 중원에서 대약탈을 가한다. 이것으로 후금의 식량난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화북의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원숭환은 홍타이지의 반간계와 숭정제의 의심으로 처형당하고 결국 요서 방어선을 만든 장본인이 죽었다. 그러나 아직 금주는 함락되지 않았다. 금주는 10년 넘게 버티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화북은 장성을 돌아서 온 후금군에게 짓밟혔고 결국 명은 점점 더 쇠락해간다.
하지만 요서 방어선과 산해관을 넘지 않는한 중원 정복은 불가능하였고 이것을 깨달은 홍타이지는 1639년부터 본격적인 요서 방어선 공략을 준비한다. 그 전에 자신이 매우 싫어하던 동쪽의 나라를 쳐야 하는거 우선이었다. 그 동쪽의 나라는 자신에게 명나라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
홍타이지: 의외의 전술가
보통 홍타이지는 용맹한 만주의 한처럼 그려지고 그의 전술적 능력과 기만책을 과소평가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사실 머리를 써서 이기는 것을 매우 선호한 군주였다.
홍타이지는 1636년 껄그러운 조선을 상대하기 위해 인조에게 기만책을 써서 인조를 완전히 낚고 조선이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1636년 12월 초에 홍타이지는 인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닿고 4만 7천의 군사로 조선을 기습하여 조선의 왕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이제 조선인들은 변발을 하고 청나라의 신민이 되어야 했으나 조선으로써는 기적적으로 천연두가 퍼지고 김준룡 등이 열심히 싸워주며 청에게 명과 싸우던 것과 차원이 다른 고통을 겪게 한다. 결국 홍타이지는 조선을 종속국으로 삼는 수준에 만족하고 심양으로 돌아간다.
1638년 이제 홍타이지는 장성을 넘어 화북을 다시 약탈한다. 하지만 이것은 요서 방어선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한 기만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도르곤과 요토는 화북을 초토화시키며 포로 46만과 은 100만 냥을 획득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다.
1639년 이들은 귀환하였고 이제 드디어 요서 방어선의 관문인 금주를 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4만 7천의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하던데 이는 예상보다는 적은 수치 아닌가? 청군의 편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그리고 그들의 허황된 동원력도 잘 살펴보자.